1.
'서 대리 퇴근 안 해?'
'이것만 마무리하고 들어가겠습니다.'
기획 2팀 팀장인 최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치 퇴근 시간을 알리듯이 금속으로 만들어진 로고 뒤에 들어오던 빛이 꺼졌다. 아림은 불이 꺼진 로고를 천천히 눈으로 훑어 읽었다.
금원기업.
아림이 5년차 대리로 일하는 금원은 그녀의 아버지 서회장이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는 기업이었다.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네, 내일 뵙겠습니다. 팀장님.'
주로 금속원료를 기업에 납품하는 식으로 안정적이게 수익을 벌던 서회장은 그것으로는 부족했는지, 최근 창명전자 납품에 난 티오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그게 어김없이 돌아온 퇴근시간에도 아림이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납품 기획서를 작성하는 이유였다.
'후우…….'
한국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창명그룹. 증권부터 전자까지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글로벌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회사였다. 그런 창명그룹에 납품하게 되면 안정성과 수익성이 높은 사업을 따내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서회장이 이번 티오에 욕심을 낼 만했다.
서회장의 명령으로 창립 이래 최초로 기획 1팀과 2팀이 협업했지만 아직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았다. 초조했던 아림과는 다르게 1팀은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듯 건성건성 일했기 때문이었다.
아림이 초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목을 죄듯 조여오는 정략결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창명전자와의 사업을 따내면, 그 순간부터 큰 공을 세우는 것이었다. 아림은 그 정도 공이면 정도면 원하지 않는 결혼 정도는 거부해도 되리라 생각했다.
'으으…….'
아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번 쭉 폈다. 야근에 시달린 아림의 몸이 이제 한계라고 울부짖고 있었지만, 몸의 주인은 그 울음을 무시한 채 카페인을 찾아 탕비실로 향했다.
탕비실 문을 열고 들어온 아림이 커피머신 밑에 컵을 대고 작동 버튼을 눌렀다. 기계에선 위잉하고 소리를 내며 컵에 고소한 향을 풍기는 커피를 가득 채웠다.
아림은 피로로 찌든 자기 몸을 깨워줄 각성제를 들고 다시 기획 2팀 실로 복귀했다. 아림이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뜻밖의 인물이 아림의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수진아.'
금원기업 기획 1팀 팀장이자 새어머니 이미경의 딸, 이복자매 서수진이었다. 수진은 아림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노트북 화면을 보며 비웃었다.
'지금 이런 걸 기획안이라고 만들고 있는 거야?'
수진은 한 손엔 테이크아웃 커피를 든채 잘록한 허리를 숙여 아림이 작성한 기획안을 슥 훑어보았다. 수진의 손에 들린 커피가 금방이라도 노트북에 쏟아질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수진아 그건-.“
'야근까지 하고, 꼴에 직장인이라는 거지?'
아림의 말을 싹둑 자른 수진은 제 손에 든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아림은 혹여 수진이 제 노트북에 저 액체를 부어버릴까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근데, 네까짓 게 만든 기획안 따위 누가 관심이나 있겠어. 그냥 원래대로 죽은 듯이 살지.'
수진은 비록 다른 배에서 나왔지만 이다지도 다른 제 자매를 한심하게 보았다.
어리석고 멍청한 서아림.
20년 전 아림의 친모가 죽은 것도 다 아림 때문이라고 모두가 말했다. 제 어미를 사지로 몰아넣은 년이 뭐가 잘났다고 기획안을 쓰고 앉아있는지.
그대로 제 어미를 따라 죽어버리면 속이 다 편할 텐데.
미경과 수진의 지속된 괴롭힘에도 부득부득 살아서 기어이 금원에 취업한 아림이었다. 서회장과 이미경은 그런 아림을 어떻게든 정략결혼으로 치워버리려고 벼르는 중이었다. 곧 노망난 늙은이나 해괴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재벌집 아들에게 팔려갈 아림을 상상한 수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이 회사는 자신의 것이 될 텐데 너무 조급하게 굴지 않아도 되었다. 결혼 장사로 팔려 갈 아림을 위해 오늘은 자비를 베풀어 볼까.
'수진아 제발…….'
'아림아. 아무리 그래도 부탁하는 건데 좀 공손해야 하지 않겠어?'
아림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수진의 말에 바로 무릎을 꿇었다. 차디찬 바닥에 아림의 무릎이 닿자, 수진의 입이 크게 벌어지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
수진은 언제나 자신 앞에서 비굴하고 무력한 아림이 마음에 들었다. 초등생 때부터 시작된 학교폭력은 수진의 주도 아래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 지속된 괴롭힘과 따돌림에 아림은 이미 학습되어졌다.
수진 앞에선 자존심을 부리면 더 심하게 보복당한다는 걸.
'내가 설마 커피를 붓기라도 하겠어? 중요한 노트북인데.'
수진은 뻔뻔스레 아림의 책상에서 떨어졌다. 아림은 안도하며 수진의 손에 닿지 않게 노트북을 닫고 옆으로 치웠다. 평소였다면 노트북이 고장나건 부셔지건 했으리라.
'고마워 수진아.'
당연해야 할 도덕도 아림에겐 무릎꿇고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노트북과 파일 둘 다 아림에게 중요한것이기도 했지만 회사의 중요한 자산이기도 했다. 하지만 노트북이 고장나는 한이 있더라도 회사에 있는 모두가 수진을 질책하지 않을것이다.
수진은 미경과 서회장의 사이에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니까. 그 이유가 수진에겐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여주었다. 독불장군도 수진 앞에선 혀를 내두를 정도의 고집과 자신감은 집안의 뒷배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그에 비해 아림은 늘 뭐든 수진보다 뒤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차별에 항상 주눅 들어있고 예민했다. 아림도 이런 자신이 답답해 노력해 봤지만 돌아오는 건 더 노골적인 비방이었다.
같은 아버지에게서 난 두 딸이지만 살아온 인생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아림은 수진의 턱짓에 그녀가 먹다 남긴 커피를 버렸다. 그 행동 하나로도 아림의 위치는 수진의 발 닦개 혹은 시녀 그 두 단어로 정의할 수 있었다.
고분고분한 아림의 태도에 만족한 수진의 전화벨이 울렸다. 아림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수진의 핸드백을 집어 수진에게 건네주었다. 수진은 당연스레 받아 든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어. 아빠'
수진은 반가운 발신인의 전화를 해맑게 받았다.
'나 아직 퇴근 전이야, 나 너무 배고픈데 우리 엄마랑 외식하자 응?'
서회장에게 맛있는 것을 사달라고 조르는 수진의 태도는 사근사근했고, 애교스러웠다. 수진은 그렇게 서회장의 마음을 곧 잘 녹이곤 했다, 그녀의 어머니 이미경처럼.
'엄마…….'
아림은 꿈에서나 그리던 단어를 한숨처럼 내뱉었다. 아림도 자신을 끔찍히 아끼던 어머니가 있었다. 20년전 그 사고로 잃기 전까지.
아림의 친모 박정아가 태어난 초진기업은 예전부터 아들이 귀한 집안이었다.
줄줄이 딸만 다섯, 그중 막내였던 박정아는 초진기업의 마지막 희망이엇다. 위의 언니들 역시 죄다 딸만 낳았고, 박정아의 아이가 자연스럽게 초진과 금원의 대를 이을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두 집안의 기대와는 다르게 박정아는 아림을 낳게 되었다.
박정아는 곧바로 둘째를 가지려고 했지만, 몸이 약해져 매번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다 아림이 7번째 생일을 앞둔 어느 날, 박정아는 사고로 갑작스레 운명을 달리했다. 그 이후 급히 사생아를 들인 초진기업은 박정아가 죽었다는 핑계로 서회장과의 인연을 끊어버렸다.
손녀였던 아림마저 매정히 버리고.
눈앞에서 초진기업을 먹을 기회를 잃은 서회장은 분노했고, 갈곳 잃은 분노는 아림에게 쏟아졌다. 적어도 물리적인 학대는 없었지만 아림은 심리적인 학대로 점점 빛을 잃어갔다.
서회장은 눈치 볼 처가도 없어졌겠다, 이미 재회해서 또다시 눈이 맞은 이미경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아림의 또 다른 지옥이 열리던 순간이었다.
'오늘은 이만 가야겠다.”
잡념이 머리를 가득 채워 이 상태로는 좋은 기획안을 만들 수 없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아림은 짐을 챙기고 회사를 나왔다. 조금 걷다 보니 어느새 창명그룹 계열사들이 모여있는 빌딩 숲에 도착했다.
그중 가장 높은 건물에 자랑스레 걸려있는 창명그룹 로고가 보였다. 저 하늘같이 높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도로에 늘어 붙어있는 껌처럼 바닥 같은 아림의 존재 따윈 보이지 않으리라.
지난 20년 평생을 수진의 그림자처럼 살았던 아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서회장에게 보이고 싶었다. 지금까지 부정당한 자신의 존재를 보란 듯이 증명해 내고 싶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몰라.'
아림은 수진을 대신해서 질 낮은 파티나 발표회를 참여하곤 했다. 그곳에 가면 서회장의 소개로 아림을 알게되었다며, 아림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이 더 많아졌다. 이대로 가다간 생전 본적도 없는 남자와 결혼식을 올릴지도 몰랐다.
결혼도 결혼이지만 아림이 당장 싫은건 남자들의 불쾌한 시선과 접근이었다. 자신을 사람도 아닌 그저 상품으로써 자신을 평가하는 그들이 너무도 싫었다. 하지만 무력한 자신은 싫다고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기회를 얻으려 성과에 아등바등 매달릴 뿐.
'그렇지만, 내가 만든 기획안을 창명에서 보기나 할까.'
아림은 고개를 들어 창명본사 건물을 바라보았다. 거대하고도 밝은 빛을 뿜어내는 창명 간판에 손을 뻗어본 아림은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손을 도로 가져왔다.
자신이 만든 기획안을 수진이 뺏어가지 안으면 다행이었다.
아림이 창명 본사 건물을 바라보던 그때, 여러 명의 보좌진과 창명전자 로비로 들어서던 남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아림을 쳐다보았다. 평소 남에게 지독히도 관심이 없던 남자였지만, 어째서인지 아림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디서 본 듯한 아림의 외향에 남자는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둥근 이마, 작지만 우뚝 선 코 그리고 눈매가 남자의 기억 속 그리운 얼굴과 겹쳐 보였다.
'장비서님.'
'네 전무님.'
남자의 최측근이자 오른팔인 장비서가 남자의 부름에 답했다.
'저기 저 여자 보이십니까.'
남자의 손끝에 걸린 아림을 본 장비서는 네 하고 대답했다. 아직 쌀쌀한 바람이 부는 초봄임에도 허름해 보이는 얇은 코트 한 장을 걸친 아림의 행색에 눈이 단번에 끌린것이다.
'저 여자에 대해 알아봐 주세요.'
'네?'
장비서는 지난 7년동안 남자를 보필하며 무수히 많은 지시를 받아왔지만, 이번만큼 당황스러운 지시는 처음이었다. 자기 상사와 관련된 일이라면 완벽의 완벽을 추구하는 장비서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큼, 흠흠. 네 알겠습니다.'
심하게 갈라진 자신의 목소리에 남자가 바라보자, 장비서는 목을 가다듬고 바로 대답했다.
잠시 시선을 뗐을 뿐인데 아림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고, 남자는 아쉬움을 남긴 채 자리를 떠나 임원진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빌딩 최고층으로 올라갔다. 문이 열리자, 남자는 비서들의 묵례를 받으며 곧바로 전무이사실로 들어갔다.
이사실에 들어온 남자는 곧바로 서울의 야경이 아름답게 빛나는 큰 창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 남자의 뒤로 문태우 전무이사라고 적힌 명패가 빛났다.
'서 대리 퇴근 안 해?'
'이것만 마무리하고 들어가겠습니다.'
기획 2팀 팀장인 최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치 퇴근 시간을 알리듯이 금속으로 만들어진 로고 뒤에 들어오던 빛이 꺼졌다. 아림은 불이 꺼진 로고를 천천히 눈으로 훑어 읽었다.
금원기업.
아림이 5년차 대리로 일하는 금원은 그녀의 아버지 서회장이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는 기업이었다.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네, 내일 뵙겠습니다. 팀장님.'
주로 금속원료를 기업에 납품하는 식으로 안정적이게 수익을 벌던 서회장은 그것으로는 부족했는지, 최근 창명전자 납품에 난 티오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그게 어김없이 돌아온 퇴근시간에도 아림이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납품 기획서를 작성하는 이유였다.
'후우…….'
한국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창명그룹. 증권부터 전자까지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글로벌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회사였다. 그런 창명그룹에 납품하게 되면 안정성과 수익성이 높은 사업을 따내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서회장이 이번 티오에 욕심을 낼 만했다.
서회장의 명령으로 창립 이래 최초로 기획 1팀과 2팀이 협업했지만 아직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았다. 초조했던 아림과는 다르게 1팀은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듯 건성건성 일했기 때문이었다.
아림이 초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목을 죄듯 조여오는 정략결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창명전자와의 사업을 따내면, 그 순간부터 큰 공을 세우는 것이었다. 아림은 그 정도 공이면 정도면 원하지 않는 결혼 정도는 거부해도 되리라 생각했다.
'으으…….'
아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번 쭉 폈다. 야근에 시달린 아림의 몸이 이제 한계라고 울부짖고 있었지만, 몸의 주인은 그 울음을 무시한 채 카페인을 찾아 탕비실로 향했다.
탕비실 문을 열고 들어온 아림이 커피머신 밑에 컵을 대고 작동 버튼을 눌렀다. 기계에선 위잉하고 소리를 내며 컵에 고소한 향을 풍기는 커피를 가득 채웠다.
아림은 피로로 찌든 자기 몸을 깨워줄 각성제를 들고 다시 기획 2팀 실로 복귀했다. 아림이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뜻밖의 인물이 아림의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수진아.'
금원기업 기획 1팀 팀장이자 새어머니 이미경의 딸, 이복자매 서수진이었다. 수진은 아림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노트북 화면을 보며 비웃었다.
'지금 이런 걸 기획안이라고 만들고 있는 거야?'
수진은 한 손엔 테이크아웃 커피를 든채 잘록한 허리를 숙여 아림이 작성한 기획안을 슥 훑어보았다. 수진의 손에 들린 커피가 금방이라도 노트북에 쏟아질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수진아 그건-.“
'야근까지 하고, 꼴에 직장인이라는 거지?'
아림의 말을 싹둑 자른 수진은 제 손에 든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아림은 혹여 수진이 제 노트북에 저 액체를 부어버릴까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근데, 네까짓 게 만든 기획안 따위 누가 관심이나 있겠어. 그냥 원래대로 죽은 듯이 살지.'
수진은 비록 다른 배에서 나왔지만 이다지도 다른 제 자매를 한심하게 보았다.
어리석고 멍청한 서아림.
20년 전 아림의 친모가 죽은 것도 다 아림 때문이라고 모두가 말했다. 제 어미를 사지로 몰아넣은 년이 뭐가 잘났다고 기획안을 쓰고 앉아있는지.
그대로 제 어미를 따라 죽어버리면 속이 다 편할 텐데.
미경과 수진의 지속된 괴롭힘에도 부득부득 살아서 기어이 금원에 취업한 아림이었다. 서회장과 이미경은 그런 아림을 어떻게든 정략결혼으로 치워버리려고 벼르는 중이었다. 곧 노망난 늙은이나 해괴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재벌집 아들에게 팔려갈 아림을 상상한 수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이 회사는 자신의 것이 될 텐데 너무 조급하게 굴지 않아도 되었다. 결혼 장사로 팔려 갈 아림을 위해 오늘은 자비를 베풀어 볼까.
'수진아 제발…….'
'아림아. 아무리 그래도 부탁하는 건데 좀 공손해야 하지 않겠어?'
아림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수진의 말에 바로 무릎을 꿇었다. 차디찬 바닥에 아림의 무릎이 닿자, 수진의 입이 크게 벌어지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
수진은 언제나 자신 앞에서 비굴하고 무력한 아림이 마음에 들었다. 초등생 때부터 시작된 학교폭력은 수진의 주도 아래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 지속된 괴롭힘과 따돌림에 아림은 이미 학습되어졌다.
수진 앞에선 자존심을 부리면 더 심하게 보복당한다는 걸.
'내가 설마 커피를 붓기라도 하겠어? 중요한 노트북인데.'
수진은 뻔뻔스레 아림의 책상에서 떨어졌다. 아림은 안도하며 수진의 손에 닿지 않게 노트북을 닫고 옆으로 치웠다. 평소였다면 노트북이 고장나건 부셔지건 했으리라.
'고마워 수진아.'
당연해야 할 도덕도 아림에겐 무릎꿇고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노트북과 파일 둘 다 아림에게 중요한것이기도 했지만 회사의 중요한 자산이기도 했다. 하지만 노트북이 고장나는 한이 있더라도 회사에 있는 모두가 수진을 질책하지 않을것이다.
수진은 미경과 서회장의 사이에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니까. 그 이유가 수진에겐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여주었다. 독불장군도 수진 앞에선 혀를 내두를 정도의 고집과 자신감은 집안의 뒷배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그에 비해 아림은 늘 뭐든 수진보다 뒤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차별에 항상 주눅 들어있고 예민했다. 아림도 이런 자신이 답답해 노력해 봤지만 돌아오는 건 더 노골적인 비방이었다.
같은 아버지에게서 난 두 딸이지만 살아온 인생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아림은 수진의 턱짓에 그녀가 먹다 남긴 커피를 버렸다. 그 행동 하나로도 아림의 위치는 수진의 발 닦개 혹은 시녀 그 두 단어로 정의할 수 있었다.
고분고분한 아림의 태도에 만족한 수진의 전화벨이 울렸다. 아림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수진의 핸드백을 집어 수진에게 건네주었다. 수진은 당연스레 받아 든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어. 아빠'
수진은 반가운 발신인의 전화를 해맑게 받았다.
'나 아직 퇴근 전이야, 나 너무 배고픈데 우리 엄마랑 외식하자 응?'
서회장에게 맛있는 것을 사달라고 조르는 수진의 태도는 사근사근했고, 애교스러웠다. 수진은 그렇게 서회장의 마음을 곧 잘 녹이곤 했다, 그녀의 어머니 이미경처럼.
'엄마…….'
아림은 꿈에서나 그리던 단어를 한숨처럼 내뱉었다. 아림도 자신을 끔찍히 아끼던 어머니가 있었다. 20년전 그 사고로 잃기 전까지.
아림의 친모 박정아가 태어난 초진기업은 예전부터 아들이 귀한 집안이었다.
줄줄이 딸만 다섯, 그중 막내였던 박정아는 초진기업의 마지막 희망이엇다. 위의 언니들 역시 죄다 딸만 낳았고, 박정아의 아이가 자연스럽게 초진과 금원의 대를 이을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두 집안의 기대와는 다르게 박정아는 아림을 낳게 되었다.
박정아는 곧바로 둘째를 가지려고 했지만, 몸이 약해져 매번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다 아림이 7번째 생일을 앞둔 어느 날, 박정아는 사고로 갑작스레 운명을 달리했다. 그 이후 급히 사생아를 들인 초진기업은 박정아가 죽었다는 핑계로 서회장과의 인연을 끊어버렸다.
손녀였던 아림마저 매정히 버리고.
눈앞에서 초진기업을 먹을 기회를 잃은 서회장은 분노했고, 갈곳 잃은 분노는 아림에게 쏟아졌다. 적어도 물리적인 학대는 없었지만 아림은 심리적인 학대로 점점 빛을 잃어갔다.
서회장은 눈치 볼 처가도 없어졌겠다, 이미 재회해서 또다시 눈이 맞은 이미경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아림의 또 다른 지옥이 열리던 순간이었다.
'오늘은 이만 가야겠다.”
잡념이 머리를 가득 채워 이 상태로는 좋은 기획안을 만들 수 없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아림은 짐을 챙기고 회사를 나왔다. 조금 걷다 보니 어느새 창명그룹 계열사들이 모여있는 빌딩 숲에 도착했다.
그중 가장 높은 건물에 자랑스레 걸려있는 창명그룹 로고가 보였다. 저 하늘같이 높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도로에 늘어 붙어있는 껌처럼 바닥 같은 아림의 존재 따윈 보이지 않으리라.
지난 20년 평생을 수진의 그림자처럼 살았던 아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서회장에게 보이고 싶었다. 지금까지 부정당한 자신의 존재를 보란 듯이 증명해 내고 싶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몰라.'
아림은 수진을 대신해서 질 낮은 파티나 발표회를 참여하곤 했다. 그곳에 가면 서회장의 소개로 아림을 알게되었다며, 아림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이 더 많아졌다. 이대로 가다간 생전 본적도 없는 남자와 결혼식을 올릴지도 몰랐다.
결혼도 결혼이지만 아림이 당장 싫은건 남자들의 불쾌한 시선과 접근이었다. 자신을 사람도 아닌 그저 상품으로써 자신을 평가하는 그들이 너무도 싫었다. 하지만 무력한 자신은 싫다고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기회를 얻으려 성과에 아등바등 매달릴 뿐.
'그렇지만, 내가 만든 기획안을 창명에서 보기나 할까.'
아림은 고개를 들어 창명본사 건물을 바라보았다. 거대하고도 밝은 빛을 뿜어내는 창명 간판에 손을 뻗어본 아림은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손을 도로 가져왔다.
자신이 만든 기획안을 수진이 뺏어가지 안으면 다행이었다.
아림이 창명 본사 건물을 바라보던 그때, 여러 명의 보좌진과 창명전자 로비로 들어서던 남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아림을 쳐다보았다. 평소 남에게 지독히도 관심이 없던 남자였지만, 어째서인지 아림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디서 본 듯한 아림의 외향에 남자는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둥근 이마, 작지만 우뚝 선 코 그리고 눈매가 남자의 기억 속 그리운 얼굴과 겹쳐 보였다.
'장비서님.'
'네 전무님.'
남자의 최측근이자 오른팔인 장비서가 남자의 부름에 답했다.
'저기 저 여자 보이십니까.'
남자의 손끝에 걸린 아림을 본 장비서는 네 하고 대답했다. 아직 쌀쌀한 바람이 부는 초봄임에도 허름해 보이는 얇은 코트 한 장을 걸친 아림의 행색에 눈이 단번에 끌린것이다.
'저 여자에 대해 알아봐 주세요.'
'네?'
장비서는 지난 7년동안 남자를 보필하며 무수히 많은 지시를 받아왔지만, 이번만큼 당황스러운 지시는 처음이었다. 자기 상사와 관련된 일이라면 완벽의 완벽을 추구하는 장비서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큼, 흠흠. 네 알겠습니다.'
심하게 갈라진 자신의 목소리에 남자가 바라보자, 장비서는 목을 가다듬고 바로 대답했다.
잠시 시선을 뗐을 뿐인데 아림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고, 남자는 아쉬움을 남긴 채 자리를 떠나 임원진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빌딩 최고층으로 올라갔다. 문이 열리자, 남자는 비서들의 묵례를 받으며 곧바로 전무이사실로 들어갔다.
이사실에 들어온 남자는 곧바로 서울의 야경이 아름답게 빛나는 큰 창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 남자의 뒤로 문태우 전무이사라고 적힌 명패가 빛났다.